태화복지재단은
3.1 운동이 태동하였던 태화관 자리에 세워진 태화는 서울 한복판에서 이 땅에 큰 평화를 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태화는 한국의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우리 사회의 격동기를 그 중심에서 함께 겪기도 했습니다.
1921년 시작된 태화는 이 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뿌리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3.1 운동이 태동하였던 태화관 자리에 세워진 태화는 서울 한복판에서 이 땅에 큰 평화를 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태화는 한국의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우리 사회의 격동기를 그 중심에서 함께 겪기도 했습니다.
1921년 시작된 태화는 이 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뿌리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1949년 인천기독교사회관 개관미국 감리교 선교사 헬렌 보일스(H. Boyles)에 의해 1949년 4월 29일에 개관한 「인천기독교사회관」은 인천 선교사 사택에서 구락부(Club)사업을 시작했고 별도 기지를 확보해 사회관을 건축하려던 순간 6.25전쟁이 터져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전쟁 후 스카릿대학 출신 고프(M. Goff)가 관장으로 부임하여 건축과 사회관 사업을 재개하였습니다. 인천 동구 창영동 42-3에 위치한 본 건물은 1993년 7월 6일 시도유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되었으며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습니다.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 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 용(用)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었습니다.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으며, 2층 가로축에 지하로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근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입니다.
1948년 주부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인형사업5대 관장인 올리버(B. Oliver)는 편물 사업을 구상하면서 실험적으로 부인들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로 인형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인형사업은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군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올리버는 미국에서 인형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을 가져다가 월남한 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인형을 만들어 오면 내다 팔아 그 이익금을 배분하였습니다. 이 사업은 가정부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겨냥한 의미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1930년대 태화사회관의 예배실 모습1939년에 태화사회관을 신축하면서 2층에 300명 정도가 입실 가능한 예배실이 갖추어졌습니다. 이 공간에서 매 주일 오후 예배와 각종 종교행사, 연주회, 결혼식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예배실 내부는 동양의 대들보 건축양식에다 서구의 고딕 양식을 가미한 독특한 장식으로 꾸며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빌링슬리(M. Billingsley) 관장은 예배실과 별도로 기도실도 꾸며 놓았는데 이는 태화사회관의 다양한 교육 및 사회사업의 영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관장을 비롯한 전 직원이 철저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기도로 하루 일을 시작하였으며, 기도를 통해 사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태화는 이처럼 사회사업과 신앙을 연결시킴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구현하려 노력해왔습니다.
1939년에 완성된 태화사회관의 옛 모습1960년대에 촬영한 옛 태화사회관의 전경입니다. 신축된 태화사회관은 동·서양의 건축미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로서 일제 말기 교회와 기독교 기관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던 시기, 중일전쟁으로 인한 행동과 사상의 제약을 받던 시기에 이룩해낸 건축이라 그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남성들도 주저하던 큰 공사를 몇 차례의 중단 위기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신축공사를 마무리하기까지는 태화의 4대 관장이었던 빌링슬리의 공로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태화 본관 신축1938년에 세워진 태화사회관의 정초석입니다. 태화사회관의 새 건물 건축 문제는 1921년 태화관 매입 직후부터 거론되었고, 400년이 넘은 건물은 파손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개관하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1년에 4천 명이 넘게 드나들면서 시설 및 사업공간의 부족함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1937년 6월부터 낡은 건물을 헐고 신축공사를 진행하게 되었으나 중일전쟁으로 공사를 맡은 중국인들이 본국으로 귀국하며 건축공사가 잠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시공자를 교체하고 중단된 공사가 다시 재개되 기초공사가 끝난 1938년 5월 14일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1939년 11월 4일 역사적인 봉헌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태화에서 활동한 여선교사들'강력한 의지력' 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 일에 도전해온 마이어스(M. D. Myers)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여자관'을 설립하고 개관 1년 사이에 4~5종의 사업들을 추진하였으며 태화여자관 개설 업무가 마무리된 후 1923년 관장직을 에드워즈(L. Edwards)에게 물려주고 나서 강원도 춘천으로 떠납니다. 마이어스 다음으로 태화여자관에 참여한 선교사는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소속의 그로브(N. Grove)로 1919년에 내한, 서울지역 여성선교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마이어스와 함께 연합사경회 및 협성여자성경학원의 조직과 운영을 주관했던 미 감리회측 여선교사는 마커(J. B. Marker)였으나, 그는 정동에서 미 감리회의 서울지방 선교사업을 주관하면서 대신 그로브를 태화여자관에 파견하였습니다. 이후 1922년에 남감리회의 콕크(M. A. Cocke)가 태화여자관 전담 사역자로 부임해 1922년 4월에 개교한 태화여학교 교사로서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1920년대 무산아동을 위한 유희장 사업(운동장 개방)태화유치원에는 비교적 부유한 집 아이들만 등록해 다녔는데 교실 밖에서 오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오후 놀이마당을 공개함으로써 공식적인 '유희장 사업'(遊戱場, Play-ground)이 시작되었습니다. 돈을 받고 유희장을 이용하도록 하겠다는 처음 계획은 후에 변경되어 무료로 개방하였고, 사업장도 태화여자관 외에 동대문 쪽에도 한 군데 더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유희장 사업은 유치원 사업과 연관되어 시작하였으나 점차 그 규모와 영향력이 증대되어 교육뿐 아니라 사회사업, 그리고 복음전도 측면에서도 큰 효과를 얻었습니다. 태화여자관은 부잣집 상류층 아이든, 버림받은 빈민촌 거리의 아이든 모두 받아들여 배움과 놀이의 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1920년대 태화유치원태화여자관은 교육적 관심에서 소외되었던 유아(幼兒)들을 위해 '태화유치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유치원이 자리 잡은 방은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치른 장소로 시작하자마자 성황을 이루어 몰려드는 학생들을 미처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등록하여 월사금을 납부함에 따라 1927년 4월부터 자립경영을 이룩하였습니다. 유치원 사업은 사회사업부(Social Service Department) 소관으로 미 감리회의 베어(B. Bair) 선교사와 그를 돕는 최활란(崔活蘭)이 맡아 운영하였고, 초기 유치원 교사로는 방성옥(方成玉)이 수고하였습니다. 일제 말기,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당한 뒤에도 최활란은 고재봉(高在鳳)과 함께 태화여자관을 지키며 태화유치원을 계속 유지하였고, 더불어 서울 시내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추진되었습니다.
한국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유도한 태화의 사회교육아래쪽에 우유라고 씌여진 복장을 착용한 학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사진은 1929년 빌링슬리(M. Billingsley)가 지도한 식생활 개선을 내용으로 한 가사과 학생들의 연극 활동 모습입니다. 개관 첫해 시작된 재봉반 사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이에 태화여자관은 가사과 (Home Economics Department)를 별도로 개설해 재봉 뿐 아니라 세탁, 수예, 요리 등을 가르쳤는데 가정학을 전공한 빌링슬리가 1928년 내한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태화여자관의 재봉반 활동1920년대 초기 재봉반 학생들의 활동상을 담고 있습니다. 1925년 4월에 열린 ‘태화여자관 수예품 전람회’에 대한 「동아일보」 1925년 4월 19일 보도 내용을 소개합니다. “시내 인사동에 있는 태화여자관에서는 작 십팔일에 동관 강당에서 수예전람회가 잇섯는데 ... 출품은 노력을 짜서 공부하는 고학생들의 손으로 만든 것인데 한 살부터 십 세 이상의 남녀 아동의 양복을 미국식으로 만드러 걸러 잇서 보는 이는 눈을 황홀하게 하야 사지 안코는 견디지 못하리 만큼 탐이 나게 하며... 관람객이 자못 답지하여 새 성황을 이루엇다더라.” 개관 첫해 시작된 재봉반 사업은 본래 태화여학교 및 협성여자성경하교 학생 가운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고학생들의 학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만든 옷가지들은 전람회를 통해 일반에게 판매되었는데, 1년에 한 차례씩 열리는 전시회는 당시 서울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재봉반의 뛰어난 솜씨로 태화여자관에 대한 평가도도 높았습니다. 이 같은 일반인들의 호응으로 1926년에는 단순한 전시와 판매가 아닌 구제사업을 위한 바자회, ‘자선시(慈善市)’를 개최하였습니다.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옛 공주중앙영아원)의 역사1980년대 지역신문에 소개된 위 사진은 지금의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이 건축되기 전 공주중앙영아원의 옛 터를 1906년에 촬영한 것입니다. 1924년 미감리회 소속 여선교사 보딩(M.P.Bording)이 중앙영아원을 창설하여 아동복지사업을 시작하였고 일제 말기, 한국전쟁 기간 중 잠시 폐쇄되었다가 1957년 ‘모자지도관’이란 명칭으로 재건, 이후 1968년 10월 공주기독교사회관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본격적인 사회사업이 전개되었습니다.
교육을 향한 한국 여성의 간절한 요청, 태화여학교로 꽃피우다.1920년대 초기 태화여학교의 학생과 선교사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태화여자관이 건물을 마련하고 그 공식적인 개관을 여자성경학원으로 개강하자 선교사들의 상상을 초월한 열기 속에 보통 20~50명 정도가 참석하는 과정에 100명 이상 몰려들고, 6주의 수업 기간이 4개월로 연장되었습니다. 성경학원에서 출발한 교육사업이 재봉과 교육 등의 실업교육으로, 그것이 다시 가정일 때문에 낮에 나올 수 없는 부인들을 위한 야학으로, 다시 정규과정을 가르치는 여학교로 확산되었습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결혼한 기혼여성들이 주로 참여한 이 여학교는 태화여학교로 개편돼 정규 국민학교 과정의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기관의 설립목적의 하나인 ‘사회사업’을 빨리 착수하고픈 생각도 있었으나 당시 상황은 ‘교육’이 급선무였습니다. 익명의 한국 여인이 선교사에게 한 말, “우리가 남에게 뭔가를 해주려면, 우리가 먼저 배워야만 한다”가 초기 태화여자관 사업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 여성들은 태화여자관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고, 태화여자관이 문을 열자 거침없이 찾아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장래의 ‘사회사업가’들이었던 것입니다.
태화가 문을 연 대한민국 우유급식의 역사1920년대 태화사회관(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에서 실시된 우유급식 모습으로, 우유를 마시기 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진지합니다. 1928년 10월부터 시작된 우유급식소(milk-station)사업은 로젠버거(E. Rosenberger)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전문 간호사 출신인 로젠버거가 1921~1928년까지 7년간 조사한 결과 당시 한국의 10살 미만 아동 조사율(早死率)이 50%에 달하였는데, 그 원인을 영양상태 불량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태화여자관 내에 우유급식소가 차려졌고 무료로 아동에게 우유가 공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한국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짐승의 젖을 먹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유급식소가 문을 연 첫해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모유를 먹지 못해 죽게 된 15개월짜리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 건강이 회복되는 사건을 통해 우유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이 불식되고 곧바로 우유보급의 확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선입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자 숭실전문학교 농과 교수로 있던 루츠(D. N. Lutz)의 고안으로 콩우유를 개발, 선교사들이 직접 콩우유 제작 과정을 실연, 시음함으로 무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태화여자관의 우유급식소는 일반인들로부터 더욱 큰 신임을 받고 우유 보급률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부인 구락부(Women's Club)를 아시나요?1920년대 부인구락부 회원들의 소풍 단체 사진입니다. 사회사업부 사업은 1925년, 태화여자관에 부임한 베어(B. Bair)와 최활란(崔活蘭)이 맡아 주관하였습니다. 이들이 태화여자관에 와서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이 구락부(Club)사업으로 같은 환경, 같은 부류의 여성들끼리 구락부를 조직해 이를 통한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조직된 것은 서울 시내 고등여학교 교사들의 모임인 ‘망월구락부(Full Moon Club)’이고, 망월구락부가 조직되던 해 사진에 소개된 부인구락부(Women's Club)도 탄생하였습니다. 부인구락부회원은 남편이 교사, 변호사, 은행원 등 고급 직종에 근무하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부인들로 이들이 모여서 주로 요리법을 배움에 따라 요리구락부(Cooking Club)라고도 불렸습니다. 망월구락부와 부인구락부가 활성화됨에 따라 1928년 어머니구락부(Mothers Club), 학생구락부(Students Club), 영어구락부(English Club) 등이 뒤이어 조직화 되었습니다.
이 땅의 여성과 아동을 위한 '태화'1920년대 아기를 업고 태화를 찾은 어머니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태화는 여성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여성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여성들이 주요 사업대상이었습니다. 초창기 사업의 90%는 여성과 아동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보건위생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해 설득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한국 부인들은 한 번 마음의 문을 연 다음에는 신뢰와 진심으로 새 일을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1925년 로젠버거(E. Rosenberger)의 아동사업 보고에 따르면 새해 들어 아기 205명이 신규 등록하였고, 제일 많이 방문할 때는 일일 35명(그중 아기 25명), 연간 2,352명이 방문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동보건과 공중위생사업이 정착되기 위해 무엇보다 어머니들의 건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필요함을 느껴 자모회(Mother's Meeting)를 결성하였고 주 1회 어머니 대상 위생강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모회는 1924년 한 해 40회나 실시되었습니다.
1921년 서울의 중심 태화여자관, 그 명칭의 유래1920년대 후반 태화 직원들과 순화궁의 모습입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삼고, 4대문과 성곽으로 확정된 서울 도읍의 중앙점을 바로 태화여자관이 자리 잡게 될 인사동 194번지에 지표석을 세웠습니다. 이 자리에 처음 자리 잡은 정치인 능성부원군 구수영(1456~1524)은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인 영응대군의 사위로 전성기 때 이곳에 있던 연못에 ‘태화정(太和亭는)’이란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 후 여러 주인이 바뀌면서 헌종 때 귀빈 순화궁 김씨가 거처하면서 순화궁으로 불리다가,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갑니다. 이완용이 2년 정도 살다가 이사하자 1918년 당시 유명 요리집 ‘명월관’의 분점이 이곳에 들어서며 구수영이 지은 정자 ‘태화정’의 이름을 따 ‘태화관’으로 새 간판을 걸게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 내 ‘별유천지(別有天地)’제 6호실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매국노로 불리던 이완용은 자기 소유의 집에서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진 사실에 부담을 느껴 집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2,700여 평에 달하는 큰 집의 새 주인이 선뜻 나타나지 않던 차에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부(Woman's Missionary Council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선교사 마이어스(M. D. Myers)가 이를 발견하여 1920년 9월 20일 이완용과 매매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듬해 1921년 4월 4일 월요일「태화여자관」이란 명칭으로 공식 개관, 사회사업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였습니다.
태화의 초대 관장, 선교사 마이어스(M. D. Myers)남감리회의 서울지역 여선교회 사업을 관장하였던 마이어스는 태화여자관의 설립을 주도했고, 초대 관장으로서 태화의 기초를 닦은 분입니다. 마이어스는 1915년 무렵부터 미국 남감리회 선교본부에 여성사회관 설립을 위한 기금 요청을 하였고, 1918년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감리교 선교백년기념 모금운동을 통해 복지사업에 필요한 일정 기금을 확보하였습니다. 1920년 9월 태화관의 실소유주인 이완용과 매매계약을 체결했지만 태화관에서 영업을 하고 있던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의 끈질긴 방해와 저항을 극복, 최종적으로 태화관 인수를 성공시켰습니다. 태화여자관 설립 이후 복음전도와 여성사업이 낙후되었던 춘천에 정착하여 1925년 10월에 '춘천여자관'으로 알려진 여자복음전도관(Woman's Evangelistic Center)을 개설하였던 마이어스는 이후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강력한 의지력, 원대한 포부의 소유자로 1934년에 별세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유쾌한 곳, 태화관1920년대 태화의 전경, 순화궁 정문의 모습입니다. 지은 지 400년이 넘은 고옥(古屋)을 개관을 앞두고 1921년 2월부터 약 2개월간 수리하였습니다. 마이어스(M. D. Myers)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고급 요정인 관계로 상류층 여인들의 출입이 제한됐던 태화관을 개관 이틀 전인 1921년 4월 1일~2일 이틀간 개방, 3~400여명이 구경하였다고 합니다. 한국 여성을 위한 기독교 사업체로서 아름답고 진기한 풍경으로 꾸며진 태화관은 일을 시작하자마자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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