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복지재단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 중단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는 태화.
그러나 끊어질 듯 이어진 태화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하여 펼쳤던 도움의 손길이 곳곳에서 펼쳐졌으며, 시대적 요구에 맞는 사업을 꾸준히 이어나갔습니다.
1949년 인천을 시작으로 50년대 들어 속속 설립된 대전, 공주, 부산기독교사회관은 태화의 기틀을 다지며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업 중단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는 태화.
그러나 끊어질 듯 이어진 태화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하여 펼쳤던 도움의 손길이 곳곳에서 펼쳐졌으며, 시대적 요구에 맞는 사업을 꾸준히 이어나갔습니다.
1949년 인천을 시작으로 50년대 들어 속속 설립된 대전, 공주, 부산기독교사회관은 태화의 기틀을 다지며 성장하였습니다.
태화빌딩의 역사1978년 4월, 서울시는 종로 2가 공평지구 도시재개발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39년에 지은 건물이 동·서양 건축미를 조화시킨 특이한 건축물이란 점, 태화관이 위치한 곳이 3·1운동 발상지라는 점을 들어 현 건물을 보존토록 해 달라는 의견을 정부 당국에 냈으나 정부 측으로부터 ‘일단 고시된 도시계획선은 변경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태화기독교사회관 개발위원회’를 열어 부지를 이전하지 않고 재개발 계획에 맞추어 건물을 빌딩 형태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1980년 12월 13일 옛 건물 철거를 마치고 땅 파기 공사를 시작, 1982년 10월 29일 준공허가를 받음으로 23개월의 신축 공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로써 15세기 말 세도가의 집터로 자리 잡은 후 조선시대 4백년, 근대 1백년 민족의 수난과 격동 시기를 목격해 온 서울 한복판 자리에 감리교 사회사업의 모체이자 상징인 태화빌딩이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서울시의 첫 위탁사업, 돈의동 아동복지사업태화기독교사회관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1971년에 의미 있는 새 사업으로 서대문구 시민아파트 금화지구 53동에서 아동복지사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사업은 태화기독교사회관이 계획해서 추진한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요청하고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 받아들이는 형태로 추진된 사업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진찰소 및 유희장 사업을 할 때 서울 근교에 임시 사업장을 마련했던 경우는 있었으나, 이번 경우처럼 정부가 마련해 준 확실한 사업공간을 제공받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사동의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과 부지 이외의 별도 사업장이 없던 태화로서는 이제 건물 밖에 처음으로 사업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금화지구를 중심으로 태화의 다양한 기본 사업을 실시하던 중 지역조사를 통해 돈의동 103번지 일대를 지역사회복지사업 대상지로 삼았으나 1977년부터 창신동에 새로운 사업공간이 마련되어 그곳에 사업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돈의동 사업은 2년 만에 종결하게 되었습니다.
태화기독교사회관 50주년 기념예배일제 말기와 6 · 25 전쟁 때 사업이 중단되고 재산까지 빼앗긴 위기가 있었음에도 태화기독교사회관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여 50년 역사를 중단 없이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40주년을 맞은 1961년은 정치 · 사회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여서 제대로 기념행사조차 하지 못했으나, 50주년을 맞은 1971년에는 한국인 관장 시대가 시작된 지 8년이 지나 정착된 체제와 조직으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1971년 4월 29일 오후 2시 태화기독교사회관 강당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예배를 거행하였습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진행한 작업은 역사 편찬이었습니다. 50년 역사를 책으로 엮어내는 일은 이사장 안신영 장로에게 맡겨졌고, 그는 일제 말기와 6 · 25전쟁으로 관련 자료가 유실된 상태에서 관련 자료들을 힘들게 수집해 힘든 역사 복원작업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1971년 3월 출판된 「태화기독교사회관 50년사」는 국판 132면 소책자였지만, 태화기독교사회관의 사업이념과 활동사항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962년 대전기독교사회관 직원 단체사진1962년 9월에 촬영한 대전기독교사회관 직원들과 선교사님의 모습입니다.
태화의 첫 한국인 관장사진은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6,7대 관장직을 역임한 문인숙(文仁淑) 관장으로, 고문위원회는 선교사 매튜스(G. Matthews)와 결혼하면서 잠시 태화기독교사회관을 떠났던 문인숙을 후임 관장으로 추천하여 이환신 감독에게 임명(파송)을 요청하였습니다. 문인숙 관장은 1949년에 처음 태화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미국 유학 기간을 제외하곤 태화에서 줄곧 근무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태화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빌링스 관장의 사업이념을 계승할 적격자이기도 했습니다. 문인숙 관장은 1963년 6월부터 1964년 6월까지 1년 동안 관장직을 수행, 비록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태화의 역사에서 한국인 관장 시대를 연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천기독교사회관 사업소개1960년대 인천기독교사회관의 사업내용을 잘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1953년 부산기독교사회관의 무료급식사업1953년 부산기독교사회관의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전쟁미망인과 고아들의 모습입니다.
1953년 부산기독교사회관과 대상자들의 모습1953년 8월 20일에 촬영한 부산기독교사회관의 선교사님들, 영세가정의 부녀자와 아동의 사진입니다.
1950년대 대전기독교사회관의 전경당시 소재지는 대전시 선화동이었으나 현재는 문화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왼쪽과 중앙은 커뮤니티센터, 오른쪽은 육아원의 모습입니다.
1950년대 대전기독교사회관의 관장과 직원들전쟁 말기 대전에 민간인 출입이 허용되자 라애시덕(E. Laird) 선교사가 1953년에 사회관을 설립하고 우유급식소, 진찰소, 야학, 전쟁미망인을 위한 재봉반 등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오른쪽 맨 아래는 라애시덕 관장, 바로 뒤 강웅준 의사, 왼쪽으로 임혜승 간호사, 박운섭씨, 박신자 간호사)
대전기독교사회관 설립자1953년 1월 대전기독교사회관의 설립자로 초대관장을 역임한 라애시덕(E. Laird) 선교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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